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기호(起鎬) 1844∼191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초명은 창호(昌鎬), 자는 경로(景魯), 호는 학어(學漁). 대군의 17대손이며 장제부정의 14대손으로 부정 승규(承圭)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남양홍씨로 진사 재응(在膺)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동래정씨로 승지 인성(寅性)의 딸이다.
 1864년(고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 주서 · 사성 등을 지냈다. 1869년(고종 6) 상호도감(上號都監)의 도제조 이하를 시상할 때 집례(執禮)로 가자되었고, 이 해 4월에도 수릉 · 경릉 · 광릉 및 휘경원의 친제(親祭) 때 집례로서 역시 가자되었으며, 전한(典翰)으로 옥당(玉堂)의 연차에도 참여하였다. 1878년(고종 15)에는 영광군수 재직시의 치적의 포상으로 승서되었다. 1881년(고종 18) 좌부승지시 문경현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다시 풀려나서 이듬해 2월 가례도감의 전교관으로 가자되었다. 동 8월 진하사 겸 세폐사의 부사로 선임되었으며 병으로 인하여 대신 민종묵(閔鍾默)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5년(고종 22) 감시의 복시 시관을 겸임하고 1887년(고종 24)에는 이조참판으로 승차했다. 1889년(고종 26) 호군 · 대사헌 등을 지내고 이듬해 책보(冊寶)를 올리고 진하(陳賀)할 때 대거승지(對擧承旨)로 가자되었다. 1899년(광무 3)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으며 1901년(광무 5)에는 진충조화(盡忠遭禍)한 벽계군(碧溪君) 혼원(混源)의 역명부조지전(易名不?之典)을 상주하여 윤허를 받고 이듬해에는 비서원승을 거쳐 동 4월에는 정2품 칙임관 3등 정헌대부로 승계되어 장례원경에 임명되었으며 1904년(광무 8)에는 박정양(朴定陽) 등과 함께 산릉도감의 당상을 받아 보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
 묘소는 광주 의일리 묘좌이다. 부천사 기종(起鍾)이 쓴 묘지가 있다.
기호(起浩) 1862∼193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치조(致祚), 대군의 17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3대손이다. 증 규장각 제학 경의(敬儀)의 아들로 어머니는 의령남씨 우교(禹敎)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동래정씨로 찬헌(贊憲)의 딸이다.
 별천으로 환로에 진출하여 내외 여러 직책을 역임하고 1908년(순종 2) 12월 24일 정3품 장례원 전사 칙임관 3등에 서임되었다.
기홍(起泓) 1864∼1921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군삼(君三), 대군의 17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3대손이다. 증 규장각 제학 경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의령남씨 우교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전주류씨로 현감 익( )의 딸과 진주강씨이다.
 별천으로 내외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1892년(고종 29) 9월 군수직을 끝내고 전화국에서 북로(北路) 전선 가설공사의 봉판으로 기용되어 원산항의 경무관이 되었고, 1898년(광무 2)에는 수릉과 홍릉 친제 때 배종한 공으로 가자되었으며, 1904년(광무 8) 7월 18일 종2품 중추원 의관 칙임관 4등에 서임되었다. 1907년(순종 1) 4월 19일 육군참장이 되고 1908년(순종 2) 1월 1일에는 궁내부 서기관이 되어 서부지방 순행 때 호종하였다. 같은 해 4월 5일 및 1910년 5월 2일 동적전(東籍田)에서 친경(親耕)할 때 집비주마과장(執찕主馬課長)으로 종경(從耕)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가좌동 선산하이다.
길구(吉求) 1793∼186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우경(佑卿), 대군의 15대손이며 여양군의 12대손으로 도사 득준(得浚)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밀양박씨 도성(道成)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능성구씨로 병사 진(縉)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의 여러 벼슬을 지내고 1860년(철종 11) 6월 20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고 같은 해 10월 임지에서 순직했다.
 묘소는 장단 선적 유좌이다.
난(?) 1582∼162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하(子河), 대군의 7대손으로 여양군의 현손이며 창녕현감 증 호조참판 규빈(奎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선산임씨로 장령 혼(渾)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고령신씨로 현감 탁(濯)의 딸이다.
 1614년(광해군 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 비변랑 · 총부도사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함평현에 부임하여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이 인정되어 통정으로 가자되어 전라우수사에 제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어영중군으로 인조대왕을 강화도에 호종한 공으로 가선에 오르고 이어 가의에 승자되면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고, 1628년(인조 6) 1월 춘신사(春信使)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통역관 박경용(朴景龍)의 부당한 통역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별세하였다. 1639년(인조 17) 관작이 추복(追復)되고 직첩을 추급(追給)받았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죽곡 후록 신좌이다.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비명을 짓고 영의정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쓴 묘비가 있다.
담(憺) 1567∼164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정(子精), 호는 허주(虛舟). 대군의 6대손이며 강성도정의 증손으로 증 이조참판 완성군 경용(景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숙부인 해주정씨로 이조참판 언각(彦慤)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평산신씨로 증 승지 길원(吉元)의 딸과 숙부인 함열남궁씨로 진사 이(?)의 딸이다.
 음직에 천거되어 별좌에 이어 정의현감을 거쳐 1614년(광해군 6) 함열현감 재직 때 경기전 조성에 공을 세워 한 품계 오르고, 이어 충청수사에 제수되었으나 1623년(인조 1) 폐모론에 가담하고 정의현감 재직 때 장오(贓汚)로 폐출되어 외딴섬에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서면 장등 묘좌원이다.
대윤(大胤) 1530∼159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술(景述), 호는 금헌(琴軒) 또는 만휴당(晩休堂), 대군의 5대손이며 춘성정 담손(聃孫)의 손자이고 증 통정대부 혼(渾)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숙부인 풍산심씨로 증 참의 언통(彦通)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밀양박씨로 부사 응종(應宗)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에 진사가 되고 1585년(선조 18)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까지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향리에서 도를 즐기며 후진계도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의 격문을 내고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품관(品官)과 교생(校生)들로 오장(伍長)을 삼고, 팔결연호(八結煙戶)로 군졸을 삼아 남원성의 수비에 대비하였으며 수문장은 생원과 진사로 삼았다. 이어 담양의 회합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대장으로, 자신을 위병소 도유사(都有司) 겸 모량장(募糧將)에 추대하여, 대장간 10여 소를 마련하여 병기를 만들었다. 또 군마와 군량을 모아 아들 엽(曄)에게 각 진영에 조달케 하였다.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3남(三南)중에서 군량 보급은 호남이 제일 잘하였다.”고 모량장 대윤에게 포상을 건의하여 통정대부 의흥위(義興衛) 상호군(上護軍)에 특제(特除)되었다. 그러나 의병을 모았다고 상을 받는 것은 선파(璿派)의 누가 된다고 상소를 올려 사양하자 선조대왕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자손에게 벼슬을 내리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 후 선산(善山) 진중에서 병을 얻어 순직하였다. 예조참판에 증직되고 월곡서원(月谷書院)에 배향(配享)됐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무산 간좌에 있다. 봉조하 이돈우가 지은 묘지에 참판 조석원이 쓰고 이기헌이 전자한 묘비가 있다.
도(燾) 1731∼180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대이(大而) 또는 달서(達瑞), 대군의 11대손이며 춘성정의 8대손으로 이복(?福)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나주임씨 만중(萬重)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옥천조씨로 연복(延福)의 딸이다.
 1782년(정조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묘소는 용정동 선산 남록 진좌에 있다.
도겸(道謙) 1677∼174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백공(伯恭), 장제부정의 7대손이며 대사성 진수(震壽)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고령박씨로 이조판서 문효공(文孝公) 장원(長遠)의 딸이다. 배위는 의령남씨 감사 정중(正重)의 딸이다.
 진사로 주부가 되고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1727년(영조 3) 11월 충청도 별견어사(別譴御史)가 되어 호서지방에서 불법을 행하는 수령의 근무기강을 바로 잡았다. 1736년(영조 12) 헌납에 올랐으며 1738년 장령에 이어 사간 · 집의를 거쳐 1739년(영조 15) 10월 동지사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다녀온 후 집의 · 보덕 및 사간을 역임한 다음 1741년(영조 17) 9월 승지로 승계되었으며 1745년(영조 21)에는 대사간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법흥리 신좌이다.
돈우(敦宇) 1801∼188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초휘는 돈영(敦榮), 자는 윤공(允恭) 또는 범야(凡若), 호는 신게(莘憩), 시호는 문정(文貞). 대군의 15대손이며 장제부정의 12대손으로 증 영의정 상두(相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대구서씨로 인수(寅修)의 딸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동래정씨로 익찬 동연(東宴)의 딸이다. 증 영의정 상형(相衡)에게 입양되었다.
 1827년(순조 27) 증광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으며 곧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 1831년(순조 31) 도청(都廳)을 역임한 후 1836년(헌종 2) 이조참의가 되고 이듬해에는 집의가 되었다. 그 뒤 1840년(헌종 6)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로 나아가 치적을 쌓았다. 1843년(헌종 9)에는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참판에 다시 등용되고 1845년(헌종 11)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 · 대사헌 · 한성부판윤 등의 관직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849년(헌종 15) 대사헌이 되었다. 1853년(철종 4) 공조판서 · 판의금부사를 거쳐 1855년(철종 6) 예조판서 ·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광주부유수를 거쳐 1857년(철종 8)에는 다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58년(철종 9) 이조판서가 되고 1860년(철종 11) 형조판서 · 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고 1861년(철종 12) 경상도 관찰사로 나아가 각지에서 발생하는 민란 수습에 전력하다가 내직을 역임, 이듬해에 또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3년(철종 14) 국장도감의 제조로 애책문(哀冊文) 제술관을 맡고, 1864년(고종 1) 좌참찬 · 판의금부사 · 호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실록찬수당상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호조판서 · 부묘도감제조를 거쳐 1866년(고종 3)에 다시 제조 · 호조판서를 지내고 그 뒤 1874년(고종 11)에는 원자보양관으로 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듬해에는 좌찬성으로 전문서사관(篆文書寫官)을 겸임한 뒤 봉조하가 되었다. 공은 일생을 관직에서 보냈지만 항상 청백한 것을 좋아하여 연꽃을 사랑한다는 `연설보(蓮說補)\'를 지어 자신의 뜻을 설파했다. 또 대군의 사적(事蹟)인 행장 · 유사 · 시 등과 덕행을 찬미한 역대 제왕의 연설(蓮說) · 치제문 · 조야 명현의 명승(銘頌) 등을 두루 조사하여 1844년 <청권집유(淸權輯遺)>를 편찬하여 대군의 사적을 후세에 전수할 수 있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고종태황제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묘소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 오선리 별산당 간좌이다. 자지(磁誌)가 있다. 유고로 <갑고(甲藁)> 6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예종지장(睿宗誌狀)> 1책(규장각 소장) <삼외록(三猥錄)> 3권 1책(규장각 소장) <완산지장(完山誌狀)> 6권 3책(규장각 · 국립중앙도서관 · 장서각 소장) <집성선승(集成先乘)> 3권 3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청권집유(淸權輯遺)> 2권 2책(청권사 · 규장각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숙부의정공(叔父議政公 · 相璜) 가장(家狀)> 1책(규장각 소장) <팔고조도(八高祖圖)> 2권 2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어연보(桐漁年譜)> 1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간첩(簡牒)> 18절 34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가섭동유록(迦葉同遊錄)>(동호인 공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