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득복(得福) 1720∼176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수(聖綏), 대군의 13대손이며 장제부정의 10대손으로 부사 시정(時鼎)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인 남양홍씨로 구택(九澤)의 딸이다. 배위는 숙인 청송심씨로 좌랑 항(沆)의 딸이다.
 1763년(영조 39) 사간원 정언, 1768년(영조 44) 사헌부 지평을 거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지평으로 전임되자 형인 득종(得宗)도 같은 관아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영조대왕이 기녀를 축첩한 조관이나 유생을 삭직 또는 방축한 일에 대하여 너무 지나친 처사임을 상소하고,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한 뒤 시일을 두고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뒤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조대왕의 병이 쾌차하자 특별 석방되었다.
 묘소는 장단 진북면 을좌이다.
득신(得臣) 1742∼180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량(聖良), 시호는 효헌(孝憲), 대군의 12대손이며 장제부정의 9대손으로 증 좌찬성 시덕(時德)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남양홍씨로 사간 정명(廷命)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풍양조씨로 한경(漢慶)의 딸이다.
 1766년(영조 4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74년(영조 50) 등준시(登俊試)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68년 홍문관 교리에 이어 부교리 · 정언 · 수찬 등을 거쳐 1773년 승정원 승지 · 수원부사를 역임하고 다음 해 대사간이 되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이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영의정 서명선의 탄핵으로 1781년(정조 5)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춘천부사가 되고 다음 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상주목사가 승려를 동원하여 화양동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수리함으로써 지방 유생들로부터 관할 감사로서 수수방관하였다는 추궁을 받았다. 1788년(정조 12) 대사헌이 되고 다음 해에 희천군수로 전임되었는데 치적을 쌓아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정조대왕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다. 1793년(정조 17) 형조판서가 되었을 때 수감중 병에 걸려 고생하는 전국의 죄수에게 약을 주어 치료해 주었다. 2년 뒤 행부사직으로 임금의 모후 혜경궁을 추존하는 경사가 있자 가자의 은전을 받았다. 그 뒤 지의금부사 · 대사헌 · 이조판서 ·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797년(정조 21)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호남에 4만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으며 이 지방의 사치가 심하여 이를 엄단할 것을 상소했다. 2년 뒤 한성부 판윤이 되고 1801년(순조 1) 정조대왕의 능을 조성하는 산릉제조(山陵提調)로서 공이 인정되어 가자되었다. 그 뒤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 왔으며 이듬해 병조판서 재임 중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덕치 손좌이다.
득일(得一) 1726∼182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희천(希天), 대군의 13대손이며 장제부정의 10대손으로 증 좌찬성 시서(時픊)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청송심씨로 구준(耉俊)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문화류씨로 참판 평손(枰孫)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진사에 합격, 광릉 · 경릉참봉 · 동몽교관 및 의금부 도사를 거쳐 1763년(영조 39)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 · 부수찬 · 수찬 · 이조좌랑 · 부교리 · 교리 · 부응교 · 응교 · 사서 겸 문학 · 필선 · 보덕 · 정언 · 헌납 · 사간 · 지평 · 집의 · 문신 선전관 · 한학교수 · 훈국어영 종사관 · 사복 · 봉상시정 · 좌통례 · 검상 · 사인 · 측후관 편집낭청 · 양전상호도감 도청을 두루 역임하고 당상인 통정으로 승계되어 우승지가 되었으며 그 후 병조참의 · 양주목사와 정주목사를 지냈다. 셋째 아들 상황(相璜)으로 인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마전 갑좌에 있다.
득제(得濟) 1743∼181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여집(汝楫), 시호는 직옹(直翁), 대군의 14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인 전성군의 10대손으로 지중추 명오(明吾)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창원황씨로 구하(九河)의 딸이다. 지돈녕 장오(章吾)에게 입계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양주조씨로 세마 정건(正建)의 딸과 정경부인 동복오씨로 대복(大復)의 딸이다.
 무과를 거쳐 선전관으로 재직 중 1775년(영조 51) 승지에 특제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영의정 신회(申晦)의 무신탁용자(武臣擢用者)로 추천되고, 그 후 병사를 역임하였다. 1776년 훈련도감의 재정에 관계된 직무유기죄로 파직되었다가 다음 해 풀려났고, 1780년(정조 4)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나가서는 관내 포흠(逋欠)이 많아 고신(告身)을 빼앗겼으며, 1782년(정조 6)에는 중국 사신의 영접비를 유용한 죄로 충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금군별장으로 재직 중 어명을 받아 은언군(恩彦君) 인(?)의 집으로 쓰기 위하여 관에서 자신의 집을 사려 하자 그 집에 방화하여 다시 유배됐다. 1790년(정조 14) 평안도 병마사로 나가 진장(鎭將)의 포폄 내용에 착오가 생겨 파직됐다가 곧 풀려나고, 이듬해 재주가 없는 자를 명궁으로 천거한 죄로 관찰사와 함께 충군의 처벌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중화에 유배됐다. 그 후 풀려나 금군별장을 거쳐 1794년(정조 18) 3도수군통제사 · 우포도대장, 여러 차례의 장용영의 별장과 1799년(정조 23) 경기수군절도사를 역임한 후 어영대장에 임명됐다.
 이듬해 잠시 좌포도대장을 거쳐 어영대장으로 재직시 병조판서 조진관(趙鎭寬)과의 분란 때문에 파직됐으나 곧 총융사에 기용됐다. 1800년 순조대왕이 즉위하자 우포도대장이 됐으며 금위대장 등 군영대장을 역임하면서 여러 차례 좌 · 우포도대장을 겸임했다. 1801년 벽파(僻派)의 공격을 받아 근무태만으로 경성에 유배됐다가 1803년 어영대장으로 복귀했다. 1806년 벽파세력의 명분을 재확립하려 한 김달순(金達淳)을 처형하라는 공격에 깊이 참여했으며 1807년 어영대장으로서 병조판서 한만유(韓晩裕)의 인사를 비난하다가 파직됐다가 다음 해 금위대장으로 복귀, 훈련대장과 우포도대장을 겸임했다. 그 뒤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을 번갈아 하다가 1812년(순조 12)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가자되어 훈련대장으로서 형조판서를 겸임 중 한시유(韓始裕)로부터 권세를 좇고, 군문의 재정을 전횡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나 순조대왕의 두둔으로 무사했으며 순조연간의 시파 · 벽파대립에서는 시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고삼면 진촌에 있다.
득종(得宗) 1718∼177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로(聖魯), 대군의 12대손이며 장제부정의 9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시복(時復)에게 입양됐다. 생부는 부사 시정(時鼎)이다. 어머니는 숙인 남양홍씨로 구택(九澤)의 딸이다.
 사마시를 거쳐 1746년(영조 22) 알성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 · 지평 · 수찬을 역임하고 1750년(영조 26) 12월 교리에 승계되었다. 이어 부교리 · 헌납 · 지평 · 교리 · 정언 · 겸문학 등의 직을 두루 역임한 후 영남어사에 발탁되었으며 1754년(영조 30)에는 승지로 승차됐다. 그 후 승지와 대사간을 번갈아 역임하다가 1760년(영조 36) 대사헌에 오르고 1764년(영조 40) 도승지가 되었다. 1767년(영조 43)에 형조참판이 된 후 대사헌 · 형조참판 · 호조참판 ·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1775년(영조 51) 6월 광주부윤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 유좌이다.
만림(萬林) 1633∼171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무경(茂卿), 대군의 8대손으로 정사공신 완계군 기축(起築)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총명하여 경서와 사서를 널리 익히고 문사로 명성이 높았다. 1672년(현종 13)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 장연현감을 시작으로 상원 · 횡성 · 홍원 · 은산현감을 두루 역임하고 많은 치적을 쌓았다. 1684년(숙종 10) 보성군수로 승직, 공평하고 엄정한 치정(治政)으로 불과 1년여 만에 극성을 부리던 토호들이 귀화하여 순종했다. 통정으로 가자되었고 1687년(숙종 13) 사천 · 운산 · 선천부사 · 정평 도호부사 등 북방의 간성으로 가는 곳마다 선정을 쌓았다. 일찍이 상원현감으로 있을 때 그릇된 폐정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케 했다. 백성들과 더불어 이 고을에 있는 동락대(同樂臺)에 올라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시 한 구를 읊되 “태수가 백성과 더불어 굶주리고 배부름을 함께 하지 않으면, 대의 이름 동락은 누구를 위함인가(太守與民飢飽異, 臺名同樂爲誰人).”라고 하였다. 임기가 되어 전직을 하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유임을 청하였던 소(疏) 중에 이 글귀가 있다. 상원 · 보성 · 선천에 선정비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송산에 있다. 묘갈명은 승정원 우승지 춘추관 수찬 조언신(趙彦信)이 찬했다.
만선(萬選) 1654∼173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택중(擇仲), 호는 모거재(慕遽齋), 대군의 10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약(若)의 아들이다.
 1693년(숙종 19) 식년시 갑과에 급제, 헌납 · 장령 · 집의 · 부제학 · 보덕 · 부수찬 · 필선 · 사간 · 교리 · 철산부사 · 사은부사 · 도승지 · 판윤 등 요직을 역임했다. 1718년(숙종 44) 치적이 없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체직하라는 탄핵을 받기도 했다. 1733년(영조 9) 정월에 80세의 재신(宰臣)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었고, 2년 뒤 사망했다.
 묘소는 금천 박달리에 있다.
만형(萬亨) 1663∼170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하(子夏), 호는 삼우재(三友齋). 대군의 7대손이며 명원군의 현손으로 익현(益賢)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창원황씨 현감 식(湜)의 딸이다. 배위는 남원양씨 응렴(應濂)의 딸이다.
 김포에 은거하며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나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학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유배당하자 유학(幼學)으로 조정의 대신들을 비난하는 소를 올린 바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부령(富寧)으로 정배(定配)가 결정되었으나 허적(許積)의 장계로 정배명령이 환수되고 다만 유벌(儒罰)을 받고 향리로 방환(放還)되었다.
 1683년(숙종 9) 학생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이 되었으며 재임 중 능침(陵寢)의 제례에 육선(肉膳)을 쓰지 않은 채 소찬으로 제사하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는 소를 올렸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여 스승인 송시열이 사사되자 유생들을 이끌고 돈화문 밖에서 소(訴)를 안고 울며 항변하다 고성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풀려나 공릉참봉이 되었으며, 건원릉 참봉 · 세마를 거쳐 함열현감으로 나가서 치적이 가장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아 숙마 한 필을 하사받았다. 1701년(숙종 27) 장악원 주부를 역임한 뒤 다시 외지로 나가 영풍현감이 되어 6년 간 재임하던 중에 순직하였다. 현직(顯職)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빈번히 소를 올려 당시의 공론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 도장동 임좌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지은 묘비가 있다.
명(溟) 1570∼164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연(子淵), 호는 구촌(龜村), 대군의 7대손으로 증 영의정 정빈(廷賓)의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 22세에 진사가 되고 1606년(선조 39)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박사 · 시강원 설서를 거쳐 정언에 올랐다. 광해군 초에 어사가 되어 용만(龍灣)에 나갔을 때 그 곳 윤으로 있던 이이첨이 지나치게 접대하는 것을 보고 뒷날 나라를 그르칠 사람이라고 하였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어린 나이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본 정온(鄭?)이 상소를 올려 극간한 사건에 공이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어 시골로 돌아왔다. 10년만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서천군수가 되고 3년 뒤에 통정에 올랐으나 곧 사직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과 동시에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황해 관찰사를 거쳐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을 당하여 인조대왕이 남쪽으로 파천할 때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에서 임금을 맞아 호위했다. 난이 평정되어 어가가 서울로 돌아갈 때 의류 등 군수품 1만여 포와 수천 석의 양곡을 호조에 보내어 수용케 했다. 이어서 경기 · 평안 · 경상 등 관찰사와 호조 · 병조 · 형조참판을 지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다시 경기 관찰사가 되어 많은 공적을 남기고 후에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분히 여겨 사직 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1638년(인조 16) 형조판서에 제수되고 이어 호조판서로 옮기어 물가를 안정시키고 전후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71세 때 사직하고자 하자 임금이 윤허하지 않아 형조판서로 옮겨 다시 세 차례 호조판서가 되어 국고를 충실케 했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판부리에 있다. 신도비는 영의정 허목이 찬했다. 유고로 <구촌유고(龜村遺稿)>가 전한다.
명우(明宇) 1836∼190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덕(景德), 호는 묵오(默吾) · 만축(晩築) · 귀래정(歸來亭). 대군의 15대손이며 양록정의 12대손으로 도정 회수(會壽)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한산이씨로 화재(華載)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광산김씨로 응택(膺澤)의 딸이다.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1869년(고종 6) 울산교관에 제수된 이래 하양 · 음죽 · 학림 · 단양 · 영월 · 은진 등 각지의 목민관을 지내면서 치적을 남겼으며 특히 영월에 재임할 때에는 장릉(莊陵)을 수리하였다. 박규수(朴珪壽) · 김병학(金炳學) · 신석희(申錫禧) 등과 깊이 교류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 두고 가야산에 들어가 귀래정을 짓고서 저술에 전력하였다. 저서로는 <묵오유고(默吾遺稿)> · <경구수록(警瞿收錄)> · <역학제요(易學提要)> · <임사편고(臨事便考)> 등이 있으며 1904년(광무 8) 효자로 계밀되어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되고 정려문을 받았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예산면읍 주교리 인좌이다. 시종원경(侍從院卿) 이도재(李道宰)가 지은 묘갈명과 동생 시우가 지은 묘지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