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목(?) 1572∼164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문백(文伯), 호는 송교(松郊) 또는 송휴(松畦), 시호는 충정(忠正). 대군의 7대손이며 장제부정(長堤副正)의 현손이고 증 좌찬성 신성(愼誠)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원주변씨로 사과 극성(克誠)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직산조씨로 생원 경(瓊)의 딸과 장수황씨 현감 우(佑)의 딸과 고령신씨 득준(得濬)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성균관 유생이 되고 1611년(광해군 3) 동료 유생들과 함께 성혼(成渾)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여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케 했다. 1611년(광해군 3)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재감 직장 · 교검(校檢)을 거쳐 1615년(광해군 7)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대북(大北)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정언 · 수찬 · 교리 · 이조좌랑을 역임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하고 이귀(李貴)의 패전 책임을 탄핵하였다. 이어 사인 · 집의 · 예조와 이조의 참의를 거쳐 1626년 대사간에 승진하고 다음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임금을 호종했다. 1631년(인조 9) 부제학에 전직, 참관을 거쳐 1636년(인조 14) 형조참판이 되고, 이 해 병자호란에 협수사(協守使)로 남한산성을 수비하면서 청나라와의 화의(和議)에 적극 반대했다. 환도 후에 윤황(尹煌) 등이 척화한 일로 유배되자 글을 올려 자핵(自劾)하고 물러났다.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으며 유학자 김집(金集)과 서로 친하여 모든 일을 의논해서 하였고, 1638년 대사헌 ·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 도승지를 거쳐 1643년(인조 21) 부제학으로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겸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보개산에 있다. 유고로는 <송교유고>가 있다.
1603년(선조 36) 성균관 유생이 되고 1611년(광해군 3) 동료 유생들과 함께 성혼(成渾)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여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케 했다. 1611년(광해군 3)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재감 직장 · 교검(校檢)을 거쳐 1615년(광해군 7)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대북(大北)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정언 · 수찬 · 교리 · 이조좌랑을 역임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하고 이귀(李貴)의 패전 책임을 탄핵하였다. 이어 사인 · 집의 · 예조와 이조의 참의를 거쳐 1626년 대사간에 승진하고 다음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임금을 호종했다. 1631년(인조 9) 부제학에 전직, 참관을 거쳐 1636년(인조 14) 형조참판이 되고, 이 해 병자호란에 협수사(協守使)로 남한산성을 수비하면서 청나라와의 화의(和議)에 적극 반대했다. 환도 후에 윤황(尹煌) 등이 척화한 일로 유배되자 글을 올려 자핵(自劾)하고 물러났다.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으며 유학자 김집(金集)과 서로 친하여 모든 일을 의논해서 하였고, 1638년 대사헌 ·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 도승지를 거쳐 1643년(인조 21) 부제학으로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겸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보개산에 있다. 유고로는 <송교유고>가 있다.
문규(文規) 1617∼168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칙(聖則), 호는 풍거(風渠), 대군의 7대손이며 춘성정의 현손이고 국형(國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부안김씨 참봉 화(?)의 딸이다. 배위는 경주김씨 증 이조참판 의(?)의 딸과 순흥안씨 건( )의 딸, 그리고 한양한씨 동지중추부사 위경(偉庚)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 1) 학행으로 경기전(慶基殿) 참봉이 되었다. 그 뒤 현릉(顯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천문학 · 지리학 · 역학 등에 밝았으며, 시 216수, 소(疏) 2편, 서 2편, 상량문(上樑文) 1편, 묘지(墓誌) 1편, 회문 2편, 정문(程文) 1편, 서(序) 7편, 기 7편, 발(跋) 2편, 행장 · 묘갈명 · 제문 각 1편 등을 남겼으며, 1835년(헌종 1) 손자 원우(源宇)가 편집 간행하였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있다. 필선 이웅징(李熊徵)이 비문을 짓고, 사간 최계옹(崔啓翁)이 묘지를 지었다. 유고로 <풍거유고> 5권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영남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652년(효종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 1) 학행으로 경기전(慶基殿) 참봉이 되었다. 그 뒤 현릉(顯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천문학 · 지리학 · 역학 등에 밝았으며, 시 216수, 소(疏) 2편, 서 2편, 상량문(上樑文) 1편, 묘지(墓誌) 1편, 회문 2편, 정문(程文) 1편, 서(序) 7편, 기 7편, 발(跋) 2편, 행장 · 묘갈명 · 제문 각 1편 등을 남겼으며, 1835년(헌종 1) 손자 원우(源宇)가 편집 간행하였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있다. 필선 이웅징(李熊徵)이 비문을 짓고, 사간 최계옹(崔啓翁)이 묘지를 지었다. 유고로 <풍거유고> 5권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영남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재(文載) 1615∼168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원(子遠), 호는 석동(石洞), 대군의 7대손이며 춘성정의 현손이고 홍문관 교리 증 이조판서 상형(尙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선산임씨로 예빈시 부정 극립(克立)의 딸이다. 배위는 삭녕최씨로 익위(翊衛) 휘지(徽之)의 딸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이며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추천으로 사직서 참봉에 제수되었다. 학덕으로 원근의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명리나 문달(聞達)에 구애받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소학>에 바탕을 두고 <대학> · <중용>과 <오경(五經)> · <근사록>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천문(天文) · 역수(曆數)에 조예가 깊었다. 시 149수, 서(書) 23편, 잡서 11편, 기(記) 1편, 제문 12편, 묘갈명 2편, 행장 1편, 유사(遺事) 3편 등을 남겼으며 1935년 7대손 남의(南儀)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묘소는 전북 임실군 조천면 청암리 뒷산 손좌에 있다. 송규렴(宋奎濂)이 비문을 지었다. 유고로 <석동유고> 8권 4책이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이며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추천으로 사직서 참봉에 제수되었다. 학덕으로 원근의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명리나 문달(聞達)에 구애받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소학>에 바탕을 두고 <대학> · <중용>과 <오경(五經)> · <근사록>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천문(天文) · 역수(曆數)에 조예가 깊었다. 시 149수, 서(書) 23편, 잡서 11편, 기(記) 1편, 제문 12편, 묘갈명 2편, 행장 1편, 유사(遺事) 3편 등을 남겼으며 1935년 7대손 남의(南儀)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묘소는 전북 임실군 조천면 청암리 뒷산 손좌에 있다. 송규렴(宋奎濂)이 비문을 지었다. 유고로 <석동유고> 8권 4책이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민발(敏發) 1599∼167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중초(仲初), 대군의 8대손이며 여양군의 5대손으로 병자호란 때 호조판서를 역임한 증 좌찬성 명(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남원양씨로 부장 사홍(思洪)의 딸이다. 배위는 창녕조씨 정립(挺立)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 부정을 역임하고 1659년(효종 10) 9월 전라우수사에 제수되었다. 1660년(현종 1) 10월에 장흥부사로 재임 때 상감을 알현한 자리에서 장흥의 폐단을 하문하자 토호가 많다고 아뢰었다. 1665년(현종 6) 12월 전라좌수사가 되었고 1668년(현종 9)에는 여흥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관곡 자좌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 부정을 역임하고 1659년(효종 10) 9월 전라우수사에 제수되었다. 1660년(현종 1) 10월에 장흥부사로 재임 때 상감을 알현한 자리에서 장흥의 폐단을 하문하자 토호가 많다고 아뢰었다. 1665년(현종 6) 12월 전라좌수사가 되었고 1668년(현종 9)에는 여흥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관곡 자좌이다.
민수(敏樹) 1594∼1661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중무(仲茂) 또는 춘경(春卿), 호는 오송(五松). 대군의 8대손으로 좌찬성 충(沖)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생원으로 증광시 병과에 급제, 감역이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을 거쳐 의주부윤을 지냈다. 1641년(인조 17)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조정에 계를 올리기를 “한나라 배(漢船) 두 척이 해중으로부터 나와 언덕에 대고 다음 날 닻을 올려 장자도(獐子島)로 직행하고 있으며 또 청나라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한나라 배가 무수히 동으로 향하고 있으니 당신네 나라에서 의당 먼저 방비해야 한다 하므로 이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소서.”라고 했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 있다.
1618년(광해군 10) 생원으로 증광시 병과에 급제, 감역이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을 거쳐 의주부윤을 지냈다. 1641년(인조 17)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조정에 계를 올리기를 “한나라 배(漢船) 두 척이 해중으로부터 나와 언덕에 대고 다음 날 닻을 올려 장자도(獐子島)로 직행하고 있으며 또 청나라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한나라 배가 무수히 동으로 향하고 있으니 당신네 나라에서 의당 먼저 방비해야 한다 하므로 이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소서.”라고 했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 있다.
민우(敏宇) 1810∼189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대규(大奎), 초휘는 진순(晋純). 대군의 15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1대손으로 증 호조참판 원구(元求)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천안김씨로 기렴(箕濂)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원주이씨로 통덕랑 병원(秉元)의 딸이다.
1840년(헌종 6) 진사하여 1850년(철종 1)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 · 외직을 두루 거친 다음 한성좌윤이 되고, 충청도 병마절도사 · 병조참판을 거쳐 가의대부에 오른 후 종정경이 됐다.
묘소는 지평 북편 미륵당 갑좌이다.
1840년(헌종 6) 진사하여 1850년(철종 1)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 · 외직을 두루 거친 다음 한성좌윤이 되고, 충청도 병마절도사 · 병조참판을 거쳐 가의대부에 오른 후 종정경이 됐다.
묘소는 지평 북편 미륵당 갑좌이다.
번(?) 1575∼163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거원(巨源), 호는 낙강(洛江), 사호(賜號)는 낙주재(洛洲齋). 대군의 7대손이며 송산도정의 현손이고 증 호조참판 사제(思齊)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주한씨로 사과 용(鏞)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문화류씨로 군자감 주부 개(愷)의 딸과 증 정부인 재령이씨로 증 판결사 대영(大榮)의 딸이다.
성품이 순후하고 영민하였으며 12세에 오리(梧里) 리원익(李元翼)에게 수학하였고 뒤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평소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1592년(선조 25) 예빈시(禮賓寺) 참봉으로 복무시는 약관 17세로 임진왜란을 맞아 류성룡의 천거로 선조대왕의 호종관을 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됨과 동시에 부사과에 제수됐다. 이어 사헌부 감찰 · 연산현감을 지내고 1613년(광해군 5) 봉화현감으로 나갔다가 정국이 혼란함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밤을 틈타 의류와 식량을 공급하였고, 연흥부부인(延興府夫人) 노씨(인목대비의 생모로 공과는 이종간이 됨)가 제주도로 귀양갈 때와 반정 후 돌아올 때 함께 수행하였다. 반정 후 정사훈(靖社勳) 책록을 사양하고 밀양으로 낙향, 1624년(인조 2) 홍문관 직제학으로 제수되었으나 이 또한 사양하고 낙동강가에 정자를 세웠다. 인조대왕은 이를 알고 `낙주재(洛洲齋)\'란 사호를 겸한 재호(齋號)와 `금지옥엽(金枝玉葉)\'이란 네 자의 어필(御筆)과 비단병풍 · 옥벼루 등을 하사했다. 1633년(인조 11)에 별세하자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제문이 내려졌으며 부조묘(不?廟) 경덕사(景德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남 김해시 상동면 묵방촌 후록 자좌이다. 승지 이승보(李承輔)가 짓고 직각(直閣) 김시윤(金始潤)이 쓴 신도비가 있다.
성품이 순후하고 영민하였으며 12세에 오리(梧里) 리원익(李元翼)에게 수학하였고 뒤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평소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1592년(선조 25) 예빈시(禮賓寺) 참봉으로 복무시는 약관 17세로 임진왜란을 맞아 류성룡의 천거로 선조대왕의 호종관을 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됨과 동시에 부사과에 제수됐다. 이어 사헌부 감찰 · 연산현감을 지내고 1613년(광해군 5) 봉화현감으로 나갔다가 정국이 혼란함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밤을 틈타 의류와 식량을 공급하였고, 연흥부부인(延興府夫人) 노씨(인목대비의 생모로 공과는 이종간이 됨)가 제주도로 귀양갈 때와 반정 후 돌아올 때 함께 수행하였다. 반정 후 정사훈(靖社勳) 책록을 사양하고 밀양으로 낙향, 1624년(인조 2) 홍문관 직제학으로 제수되었으나 이 또한 사양하고 낙동강가에 정자를 세웠다. 인조대왕은 이를 알고 `낙주재(洛洲齋)\'란 사호를 겸한 재호(齋號)와 `금지옥엽(金枝玉葉)\'이란 네 자의 어필(御筆)과 비단병풍 · 옥벼루 등을 하사했다. 1633년(인조 11)에 별세하자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제문이 내려졌으며 부조묘(不?廟) 경덕사(景德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남 김해시 상동면 묵방촌 후록 자좌이다. 승지 이승보(李承輔)가 짓고 직각(直閣) 김시윤(金始潤)이 쓴 신도비가 있다.
봉의(鳳儀) 1839∼191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선익(善翼), 호는 송고(松皐), 초휘는 지겸(志謙). 대군의 1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2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태순(泰純)의 아들이다. 출생지는 전남 영광군 대마면 섬암이며 흥해군수 득강(得江)이 증조부이며 기장현감 중철(重喆)은 5대조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연일정씨로 진사 증 남대지평 예환(禮煥)의 딸이다. 완릉군 경우(景宇)에게 입후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반남박씨로 감역 종안(宗顔)의 딸과 정경부인 강릉김씨로 참봉 연식(演植)의 딸이다.
1854년(철종 5) 별천으로 선전관에 임명된 다음 순천 · 남양 · 창성과 1869년(고종 6) 양주목사를 역임한 다음 1877년(고종 14)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1879년(고종 16)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후 1883년(고종 20) 좌변포도대장에 임명되고 1885년(고종 22)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다. 1891년(고종 28) 수릉(綏陵) 산릉친제(山陵親祭) 때 별군직을 맡아 가자되고, 다음 해 우변포도대장이 되었으며 1894년(고종 21) 한성부 판윤 겸 통어사와 경리사를 겸임했다. 같은 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곧 경무사(警務使)를 겸한 총어사(總禦使)로 전보되었으며 다음 해 중추원 1등의관(一等議官)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용됐다. 1897년(광무 1) 인산시 배왕대장(陪往大將)으로 차출되었고 궁내부 특진관 때 서훈 4등에 올라 8괘장(八卦章)을 받았다.
그 후 경무사 및 헌병사령관, 육군참장에서 부장으로의 승진과 동시 원수부 회계국총장, 칙임관 1등에 오르면서 군부대신 · 원수부 군무국총장 · 의정부 찬정 · 호위대 총관 · 원수부 사무총장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광무 9)에 가자되고, 다음 해 태의원경(太醫院卿) 때 훈3등 태극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9월 판돈녕사사에 올라 칙임관 1등이 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 때에는 일제의 이른바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에 봉작됐으나 모든 관직을 버리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다.
1854년(철종 5) 별천으로 선전관에 임명된 다음 순천 · 남양 · 창성과 1869년(고종 6) 양주목사를 역임한 다음 1877년(고종 14)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1879년(고종 16)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후 1883년(고종 20) 좌변포도대장에 임명되고 1885년(고종 22)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다. 1891년(고종 28) 수릉(綏陵) 산릉친제(山陵親祭) 때 별군직을 맡아 가자되고, 다음 해 우변포도대장이 되었으며 1894년(고종 21) 한성부 판윤 겸 통어사와 경리사를 겸임했다. 같은 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곧 경무사(警務使)를 겸한 총어사(總禦使)로 전보되었으며 다음 해 중추원 1등의관(一等議官)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용됐다. 1897년(광무 1) 인산시 배왕대장(陪往大將)으로 차출되었고 궁내부 특진관 때 서훈 4등에 올라 8괘장(八卦章)을 받았다.
그 후 경무사 및 헌병사령관, 육군참장에서 부장으로의 승진과 동시 원수부 회계국총장, 칙임관 1등에 오르면서 군부대신 · 원수부 군무국총장 · 의정부 찬정 · 호위대 총관 · 원수부 사무총장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광무 9)에 가자되고, 다음 해 태의원경(太醫院卿) 때 훈3등 태극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9월 판돈녕사사에 올라 칙임관 1등이 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 때에는 일제의 이른바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에 봉작됐으나 모든 관직을 버리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다.
사성(師聖) 1570~ ?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초휘는 사맹(師孟), 자는 호연(浩然), 호는 귀래정(歸來亭). 대군의 7대손이며 밀산부수의 현손이고 증 가선대부 승기(承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원주변씨로 현령 홍(洪)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문화류씨로 참봉 순경(舜卿)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에 합격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한 다음 형조 · 병조참의 등을 지내고 가선대부에 승계되어 행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한 후 말년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3대 추증의 은전을 받았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유고 2권이 남아 있다.
1606년(선조 39) 진사에 합격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한 다음 형조 · 병조참의 등을 지내고 가선대부에 승계되어 행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한 후 말년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3대 추증의 은전을 받았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유고 2권이 남아 있다.
사주(師朱) 1576(?)∼ ?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밀산부수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송화현감 증 병조참판 승기(承器)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원주변씨로 통훈대부 홍(洪)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밀양박씨로 증(增)의 딸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로 이천(伊川)도호부사로 재임 때인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출정하여 황해도 금천의 저탄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시신을 찾지 못해 그의 의관으로 장사 지냈다. 조정에서 병조판서로 추증하여 충신정려(忠臣旌閭)하였으며 금천의 민충사(愍忠祠)에 종향(從享)했다.
묘소는 경기도 부천 소래 양지동 선영하에 있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로 이천(伊川)도호부사로 재임 때인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출정하여 황해도 금천의 저탄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시신을 찾지 못해 그의 의관으로 장사 지냈다. 조정에서 병조판서로 추증하여 충신정려(忠臣旌閭)하였으며 금천의 민충사(愍忠祠)에 종향(從享)했다.
묘소는 경기도 부천 소래 양지동 선영하에 있다.